씩제프 - 후불의 명곡
의기소침한 나날들이었다. 세상에 좋은 음악은 옛날부터 너무나 많았고, 지금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음악을 잘 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상업적으로도 성공했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도 계속 좋은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 음악으로 내 삶을 도모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우호적이지 않은 여건에서 좋은 음악을 만들어내는 방법도 몰랐다.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곧 무너져버릴 테니.
밴드 리더의 입장을 벗어나, 오랜만에 다른 밴드의 멤버 생활을 시작했다. 어떤 싱어송라이터의 세션도 했다. 내가 작곡한 음악들은 아니었지만 합주와 공연, 발매에 성실히 참여했다. 그렇게 3년 정도를 보냈다.
그러고 나니 어떤 순간, 음악이라는 것이 원래 계속 세상 어디에나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 음악가들은 그저 세상에 이미 존재했던 호수 물을 퍼다가 레이블링만 해서 시장에 내다 파는, 어찌보면 현대판 ‘봉이 김선달’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음악이란 것은 때로는 어떤 사람의 삶을 바꿀만큼 위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의 어떤 부조리도 바꿀 수 없기도 한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가슴 아픈 일들을 알고 나면, 나의 투쟁은 아주 작아보이기도 한다. 내가 음악을 관둔다고 한들 그게 별일인가, 세상에 달라질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코를 푼 다음 찾아오는 잠깐 머리가 아픈 정도의 작은 진통조차도 없을 것이다.
생각에 무게를 덜어냈다. 차라리 온라인상의 어떤 ‘바위 표면’에 나만이 갖는 작은 발자국을 남기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에서 산에 갔다가 ‘누가 왔다감’ 같은 낙서를 남기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지만, 매일 10만곡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이 세상에 겨우 13곡 담긴 앨범 하나 정도 발매하는 일이야 문제없을 테니.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기저기서 칭송받을 ‘불후의 명곡'을 써서 남기고야 말겠다고 거창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달, 일 년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그저 무료입장/자율기부 팁박스에 의존해야 하는 나뿐만이 아닌 많은 ‘아티스트’의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참하게만 놔두지는 않았던, 작은 행운들을 보여준 세상의 좋은 부분에게, 나 역시 좋은 곡을 써서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노래들을 쓰고 ‘후불의 명곡’이라 부르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63분이라는 길이의 앨범을 작업하면서 ‘이런 곡이 꼭 들어가야 하는 걸까’ 같은 질문을 많이 했다. 월별로 내야 하는 싱글처럼 잘 기억나는 멜로디나, 따라부르기 쉬운 후렴 같은 것이 언제나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무명의 가수가 쓰는 모든 곡이 그래야 한다고 하면, 어떤 소중한 음악들은 빛을 볼 일이 없을 테니, 정규앨범에는 그들이 수록될 기회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된 길을 선택해놓고 부딪히며 넘어져도 지치지 않는 젊음이 부럽고 질투가 난다. 나는 이제 적지 않은 나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처음 제대로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도 벌써 적은 나이가 아니었고 그때부터 13년은 지났으니 더욱 그렇다. 음악생활을 지지해주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나는 재능있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겪어야 했던 어떤 괴로운 일들을 저들은 겪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도 들지만, 내가 저렇게 음악을 시작했으면 조금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라는 막연한 답없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세상이 내게 주는 좋은 기회들을 더는 놓치고 싶지 않다. 음악은 내게 그저 여러 가지 기회 중 하나일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앨범을 듣는 사람들도 세상이 삶에 주는 기회를 잡을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을 이뤄낼 수 있길 바란다. 아무쪼록 음악하는 젊은 이들에게도, 나와 비슷한 입장인 이들에게도, 그 밖의 모두에게도 위안의 메세지가 되길 바라며.
credits
released April 16, 2025
composed & lyrics by 박용규
arranged by 박용규
vocals by 박용규
guitars, bass by 박용규
keyboards, synth by 박용규
drums by 박용규
SFX by 박용규
narration by 한곰돌 (track 7)
additional piano by 한곰돌 (track 13)
발매일
수록곡
- 효자손
- 보톡스 대신 썬더버드
- 외기러기 (황사의 이미지)
- 18273960 새로운종말
- 미스터 스마일
- 과거의 오늘
- 낭만주파수
- 무지무지
- 붐(빈다)
- 27살이 되던 날 밤에 썼어야 하는 포크
- 락위험
- 콩나물
- 변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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